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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PICK' - ‘갭이어’ 1년…범생이 은재는 왜 ‘경험’이라는 학교를 선택했을까

YUN
2020-09-17
조회수 573


뉴스 기사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04374.html


1년 ‘놀고 온’ 고등학생 이은재

중학교 학생회장 하던 모범생
고교 진학 미루고 ‘갭이어’ 선택
6개월간 6개 나라 세계여행
6개월은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

“학교에서 그렇게 외웠는데
박물관 가니 하나도 생각 안 났어요
진짜 공부는 내 것이 돼야 하는 거죠”

중학교를 마치고 갭이어를 보낸 경험을 담은 <딱 일년만 놀겠습니다>를 쓴 경기도 파주 동패고교 1학년생 이은재가 지난 7월26일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중학교를 마치고 갭이어를 보낸 경험을 담은 <딱 일년만 놀겠습니다>를 쓴 경기도 파주 동패고교 1학년생 이은재가 지난 7월26일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새로 시작할 체력도 없고 첫발을 내디딜 엄두도 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몸담고 있는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쉬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동패고등학교 1학년인 이은재(17)에게 중학교 3학년이던 2017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행평가, 학원 수업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앞으로 가속화할 입시 경쟁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비평준화 지역인 파주 지역에서 상위권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어느 날, 여기를 잠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쉼표가 필요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그는 ‘갭이어’(gap year)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갭이어는 1960년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여행, 해외봉사, 인턴십 등의 프로그램을 경험하며 진로 등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최근에는 직장이나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원하는 일을 해보는 것까지 그 의미가 확장됐다.


이은재는 2018년을 갭이어로 설정했다.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쓸 때 입학 포기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018년은 이은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무수한 순간들로 채워졌다. 1년 뒤 2019년 3월, 이은재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여름방학이 막 시작되었다는 7월26일 경기도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은 그가 지난해 하반기에 갭이어 1년 동안의 경험을 정리한 책 <딱 일년만 놀겠습니다>(나무를심는사람들, 2019)를 쓴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가기가 두려웠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지난주 금요일인 19일부터 방학이었어요. 하지만 인문학 강연 행사가 있어서 오늘까지 학교에 다녀왔죠.”


―같은 학년에 있는 친구들이 한살씩 어리잖아요.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어요?


“처음엔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좋아요. 제가 한살 많다는 사실을 새 학기 시작하고 한달 정도 지나서 얘기했어요. 처음 만난 사이에 나이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좀 그렇잖아요. 그사이 이미 반말을 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거리감이 거의 없어요.”


―다행이네요. 학교로 복귀한 지 한 학기가 지났는데 적응은 좀 됐나요?


“중간고사 볼 때까지만 해도 얼떨떨했는데 기말고사가 끝나니 비로소 적응된 것 같아요. 처음의 경계와 긴장이 조금 가라앉고 이제는 학교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이 생겨서 적응이 된 것 같아요.”


―처음에 왜 경계하고 긴장했나요?


“작년에 학교에 다니지 않을 때 학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많이 생겼어요. 일방적인 수업 방식이나 과도한 서열화,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같은 것이요. 내가 비판하던 학교로 다시 돌아가도 되는 걸까 고민도 많이 했지요. 그래서 학기 초에는 학교를 좀 경계했던 것 같아요. 학교로 돌아오니 학교에 대한 비판도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학교가 경쟁만 부추기고 모든 선생님들이 권위적이라고 흑백논리처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거더라고요.”


―갭이어를 선택한 계기는 뭐였나요?


“초등학교 때는 거의 놀면서 지냈고 공부를 시작한 게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어요. 다행히 열심히 했더니 어느 정도 성적을 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위협적인 말들이 계속 들려오는 거예요. 고등학교에 가면 훨씬 더 어려울 거다, 토익이나 텝스 같은 영어 공인 점수를 받아놔야 한다, 다른 지역 애들은 이미 고등학교 수학을 다 끝냈다 같은 말이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이은재의 어머니 김용신씨는 “은재는 하루하루 규칙적이고 성실하며 한치의 오점도 없이 생활해내려는 강박이 심했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를 몰아치면서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예를 들면 체육 수행평가를 앞두고는 아침 7시에 등교해 원반을 던지고, 밤 11시30분까지 배구 연습을 하는 식이었다. 이은재에게 고교 선행학습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저는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바쁘게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현행도 벅찬데, 어떻게 선행을 하나 생각했지요. 고등학교 들어가면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만 점점 커졌어요. 이렇게 하다가는 고등학교 생활은커녕 대학도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려웠어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할까


―부모님께서 먼저 갭이어 얘기를 꺼내셨다면서요?


“중학교 2학년 때에도 이미 여행 얘기를 하긴 했거든요. 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으며 제 의중을 살피셨어요. 오빠도 갭이어 여행 프로그램을 다녀왔거든요.”


국내에는 중학교 졸업 후 진학을 미루고 1년간 방학을 선택하는 청소년을 위한 갭이어 프로그램이 여럿 있다. 일주일 중 이틀은 또래들을 만나고 닷새는 가정에서 자기주도적 생활을 하는 방식의 ‘꽃다운 친구들’ 프로그램, 덴마크의 행복교육을 상징하는 ‘에프테르스콜레’를 모델로 삼은 ‘꿈틀리인생학교’, 상주 청소년 인생학교 ‘쉴래’, 자유학년제로 운영하는 ‘오디세이학교’ 등이 있다. 이은재가 선택한 프로그램은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하고 산다’를 구호로 내세우는 세계여행학교 ‘하반하’였다. 1년에 10개월 동안 다양한 대륙의 나라들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얼마나 많은 나라에 지인을 새겨두느냐, 방문하는 나라의 문화를 얼마나 잘 배우느냐에 초점을 둔다. 이은재는 10개월 중 6개월만 참가했다.


―부모님의 교육 방식 자체가 열려 있는 것 같네요.


“네, 많이 열려 있는 편이에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매일 불을 켜놓은 상태로 안경 쓴 채 잠들었거든요. 수행평가 과제가 많아서요. 그 당시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활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서 ‘얼마나 대단한 걸 하려고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하느냐’며 나무라셨죠.”


―부모님이 여행을 권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비용도 만만찮을 텐데요.


“제가 살던 세상에서 나와 더 큰 세상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 하반하를 선택한 것은 삶의 기초가 되는 강건한 체력을 기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해외여행이니 비용(6개월에 약 1500만원)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하반하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매우 검소해서 아주 큰 비용은 아니라고 판단하셨다고 해요. 제가 1년 동안 학원 등 사교육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비용을 감안한 거 같아요.”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은재의 부모 역시 학창 시절 성실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강박적으로 사는 은재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아빠가 자주 하는 말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체력부터 길러라’,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은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잠을 많이 자고 산책을 해야 한다’다.


―하반하의 단체 생활이 학교와 다른 점이 있나요?


“하반하에서는 친구들과 24시간 내내 붙어 다녀야 해요. 학교에서는 서로 많이 붙어서 지내진 않잖아요. 수업 들을 때는 조용히 각자 앉아 있고 서로 얘기하는 것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이 정도잖아요. 학교에서는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있죠. 그렇지 않은 모습은 감출 수도 있고요. 하지만 하반하에서는 그게 불가능해요. 깨어날 때부터 잘 때까지 모든 걸 함께 하게 되니 밑바닥을 보여줄 수밖에 없더라고요.”


―어떤 친구들과 함께 지냈나요?


“학교에서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는 친구도 있고, 고등학교 다니면서 무작정 목표 없이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될까 고민하는 친구도 있어요. 저처럼 학업에 지쳐 오게 된 친구도 있고요.”


―처음에 겁 안 났어요? 출국할 때 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웃고 있던데.


“엄청 겁났죠. 그런데 여행을 떠올리면 그저 즐겁잖아요. 여행지에서 영화 같은 일도 있을 거라는 환상도 있었고. 첫 여행지인 헝가리에 도착해서 무거운 배낭을 들 때 실감했지요. 이게 현실이구나, 여기는 한국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은재는 세계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이집트 사막 갔을 때를 꼽았다. “해는 지고 사방은 다 모래고, 모래를 만져도 까슬까슬한 알갱이가 하나 없고. 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데 그 자체로 너무 좋더라.” 이은재 제공

이은재는 세계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이집트 사막 갔을 때를 꼽았다. “해는 지고 사방은 다 모래고, 모래를 만져도 까슬까슬한 알갱이가 하나 없고. 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데 그 자체로 너무 좋더라.” 이은재 제공


“내가 민폐 끼치는 사람이 되다니”


이은재는 2018년 3월부터 8월까지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터키, 이집트를 여행했다. 하반하는 갭이어 프로그램 중 규율이 강한 쪽에 속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단어를 외우고 일기를 쓰도록 하는 규칙 덕에 기억하는 일, 기록하는 일에 적응해갔다. 날마다 수영이나 조깅 등을 해야 해서, 체력도 길러졌다. 몇십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공동생활 감각을 익히게 했다. 나머지 일과는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며 영어 독해나 영어 단어 외우기를 했다.


―교육과 공부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겠어요?


“학교에서 그렇게 공부를 했어도, 역사를 달달 외웠어도 박물관 가서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사막에서 별을 볼 때도 수업시간에 별자리를 그렇게 외웠는데 하나도 모르겠고. 그냥 단순히 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삶을 즐기는 데 쓸 수 있게끔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뭐든 내 것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꼭 앉아서 책 보고 강의를 듣지 않아도 되죠. 걸어 다니며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고 바다 경치도 보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발견하는 것도 사실은 공부인 것 같거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이집트에서 사막에 갔을 때였어요. 해는 지고 있고 사방이 다 모래고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데, 그 자체로 너무 좋더라고요. 모래를 만져도 까슬까슬한 알갱이가 하나 없고. 신기했어요. 이제까지 봤던 풍경 중 최고였어요. 침낭에 몸을 넣고 누워 별똥별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어요. 꾸벅꾸벅 졸다 놓치고 말았지만요.”


이은재는 ‘작아지는’ 일이 많았다. 여행지에서는 책상 앞에서 버티는 게 체력이 아니었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오랫동안 걷고 남들이 힘들어하는 일을 솔선해서 하는 것이 체력이었다. 민첩성과 지구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닭싸움, 피구, 발야구 등 두 팀으로 나뉘어 운동을 할 때마다 그는 친구들에 의해 같은 팀으로 선택받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남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친구들은 배낭에다 요리 도구, 악기까지 짊어지는데 그는 힘들어서 친구들에게 배낭을 맡겨야 할 때도 있었다. 중학교 전교회장 출신의 모범생으로 칭찬만 받던 자신이 상황에 따라, 공간에 따라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마다 이은재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 배려하고 베푸는 일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고 한다.


“어느덧 내가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돼 있더라고요. 내가 그렇게 흠이 많은지 몰랐어요. 실제로 공동생활을 해보니까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자세가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어려운 일을 자꾸 꺼리고 있고 뒤로 물러나 있고. 그런 태도 때문에 그 안에서 신뢰를 많이 못 받은 것도 같아요.”


―공동체에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같은 것이었군요.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많이 속상했어요. 더 이상 물러나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쓰레기를 치울 때도 먼저 그걸 가지고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잖아요. 남이 꺼리는 일을 먼저 나서서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내내 생각했어요.”


―베푸는 가치에 대해 눈을 뜬 시기이기도 할까요?


“지난해 경험과 직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제 목표가 ‘나누며 살자’ ‘나누면서 공부하자’거든요. 실제로 적은 돈을 쪼개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행복했던 것 같아요.”


2018년을 이은재는  “내가 1년간 뭘 했고, 뭘 느꼈고와 상관없이 이 시간은 내게 참 좋은 시간이었다. 버티지 않아도 유유히 하루를 보낼 수 있어 건강하고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8년을 이은재는 “내가 1년간 뭘 했고, 뭘 느꼈고와 상관없이 이 시간은 내게 참 좋은 시간이었다. 버티지 않아도 유유히 하루를 보낼 수 있어 건강하고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금이 벅차다고 느낀다면


2018년 8월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9월부터 이은재는 스스로 배우는 일에 몰입했다. 청소년 수련관에서 아침 수영을 하고 양천도서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한자 수업을 들었다. 청소년을 위한 교육 공동체 ‘나다’에서 인문학 강의를 듣고 동네 카페와 도서관을 순회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책과 학문이 나를 잡아끄는지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내가 1년간 뭘 했고, 뭘 느꼈고와 상관없이 이 시간은 내게 참 좋은 시간이었다. 버티지 않아도 유유히 하루를 보낼 수 있어 건강하고 행복했다. 이 시간은 내게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 배움을 찾아 나선 것 같아요.


“따로 계획하지는 않았어요. 부족한 것을 채워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특히 수영장 아저씨 아줌마, 한자반 할머니 할아버지, 여행지의 식당 및 숙소 사장님들, 그리고 어른 여행자들을 많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아는 어른의 삶이라고는 제 엄마, 아빠의 삶밖에 없었는데, 어른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편견과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이 있었나요?


“나다에서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받았던 질문이 있어요. 왜 교복을 안 입으려고 할까, 왜 화장을 할까. 예전에 저는 교복을 입지 않은 친구는 학교 규칙을 따르지 않는 뭔가 문제가 있는 애라고 생각했죠. 당연한 걸 안 하니까요. 근데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게 그 아이만의 잘못이 아니더라고요. 교복이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겠더라고요. 화장을 하는 이유의 중심에도 외모지상주의나 성역할을 공고히 만드는 사회적인 압박 같은 게 있고요.”


되돌아간 학교에서 이은재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대하는 법이 달라졌다. 우선 선생님을 인터뷰하는 걸 취미로 삼았다. 선생님이 한 학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학생의 가정환경, 관심사, 취미를 알아야 하듯 학생이 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일부러 선생님을 쫓아가서 왜 선생님이 됐는지, 현재 일에 만족하는지, 그동안의 삶은 어땠고 앞으로의 삶은 어떨지 여쭤봐요. 선생님도 나와 같은 불완전한 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돼요.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형식적인 조언보다 더 도움이 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요.”


―친구들과는 어떤가요?


“이전까지 한번도 친구들에게 제 고민을 얘기해본 적이 없는데 올해 처음으로 걱정과 고민거리를 다 털어놨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저를 대신해서 너무 열심히 고민해주는 거예요. 신기하고 고마웠죠. 친구들 한명 한명에게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이 모든 게 갭이어 경험 덕분에 생긴 여유에서 비롯하는 것 같아요.”


―공부에 대한 두려움은 좀 줄어들었나요? 한국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잖아요.


“학업에 대한 두려움은 늘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열심히 했으면 그걸로 됐다, 결과는 한 만큼 나올 것이고 결과가 안 좋으면 그에 따라 또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또 직접 해보니 오히려 못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요즘은 수업이 재밌고 공부하는 것도 좋아요. 아마 에너지가 많이 보충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갭이어를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이 벅차다고 느끼는 누구나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더 잘해야 된다,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압박을 많이 받으며 살잖아요. 저는 1년을 쉬다 왔으니까 아직은 에너지가 있어요.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났는데 벌써 너무 지쳐버린 친구를 볼 때 갭이어 생각이 나요.”


<딱 일년만 놀겠습니다>(나무를심는사람들, 2019)

<딱 일년만 놀겠습니다>(나무를심는사람들, 2019)


“내가 무엇에 관심 갖는지 알게 돼”


―책날개에는 원래의 꿈이 변호사라고 적혀 있어요. 지난 1년의 경험으로 장래희망이 바뀌었나요?


“지금은 직업을 정해놓지는 않은 상태예요. 가고 싶은 학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죠. 지난 1년 동안의 경험 덕에 제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됐어요. 사회학에도 관심이 있고 심리학도 공부하고 싶어요. 그 안에서 조금씩 좁혀나가면 될 것 같아요.”


책의 표지에 적힌 질문을 다시 읽는다. “범생이 은재는 왜 학교를 떠났을까?” 이 질문은 바뀌어도 좋겠다. 은재는 왜 다른 학교에 갔을까? 경험이라는 학교에, 여행이라는 학교에,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도 계속되는 학교에. 이은재를 만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인생에서는 내가 나를 알아가고 발견하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 인생은 다름 아닌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도와줘도 결정적일 때 나를 믿고 이끌어야 할 존재는 나다.


이은재는 이제 운동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운동장에 안 누워본 사람은 모른다. 실제로 누운 사람만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좋다, 편안하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1년의 ‘떠남’ 덕에 그는 아무리 바빠도 스스로에게 여유를 내주는 법을 터득했다. 여유에 이유를 찾아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는 지금 삶이라는 운동장에서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녹취 원영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04374.html#csidx0321a08fe4ee2dd8f9028a49af636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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